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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현-주은이네 이야기/John's Story

한자 놀이(?)를 즐기는 아이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온 종현이가 한글 읽고 쓰는 것이 또래 아이들에 비해 느려서 귀국후 한국 초등학교에 잘 적응할까 좀 염려가 되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빠른 적응에 마음이 놓이긴 하다.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는 능력은 엄마를 닮았나 보다.)

초기에 일기 숙제를 할 때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어려워서 짜증내고 힘들어 하더니 이제는 (물론 맞춤법은 아직 완전하지 않지만) 혼자서 7-8문장은 제법 쉽게 써 내려간다.  더듬더듬 한자 한자 힘들여 발음하던 책읽기도 국적불명의 억양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국어책 읽기'가 되어가는 것 같다.

요즘 종현이가 또 재미붙인 것이 한자 공부다. 아니, 공부라기보다는 한자 놀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종현이가 한국 초등학교 다니면서 요즘 초등학생들은 영어뿐만 아니라 한자도 공부한다는 사실에 힘들어하면 어쩌나 염려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모든 일에 한자를 적용하면서 놀고 있다. 지난 달 한자능력시험(8급)을 봐야 할 때는 낯선 글자들의 모양과 뜻 따로 음 따로의 한자체계가 어색한지 힘들어 했었는데 그동안 '태극천자문'이라는 만화영화를 보면서 한자놀이도 재미있다는 것을 배운 것 같다.  만화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에 맞게 한자의 뜻과 소리를 외치는 장면을 따라하며 놀곤 한다. (덕분에 미국에서 가져온 포케몬 카드는 잊혀지고 새로 산 한자카드가 좋은 장난감이 되었다.)

길가다 한자로 쓰여진 상점의 간판에 아는 한자라도 하나 있으면 막 아는 체를 한다.  요즘에는 일상 대화도 (없는 한자까지 스스로 만들어 가며) 한자로 표현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치과 다녀온 저녁에 이를 닦다가)
"아비 부, 아들 자, 이빨 이, 아플 통"

  --> "아빠, 아들이 이가 아파요."

(숙제하는 동안 엄마가 전화통화를 좀 길게 하니까)
"어미 모, 전화 전, 소리 음, 방해할 방"
  --> "엄마, 전화 소리가 방해되요."

(동생 주은이와 놀다 다툴 때)
"여자 여, 동생 제, 방해할 방, 오빠 형"
  --> "주은이가 방해해요."

한국에 와서 처음에는 아이가 국어도 못하는데 한자까지 해야 하나 싶어 걱정했고, 종현이가 힘들어하면 안 해도 된다고 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한자놀이(!)를 즐기고 있으니 할 말은 없다. (한자놀이라고 하는 이유는 아직은 쓸 줄은 모르고 정확히 읽는 한자도 얼마 안 되지만 그냥 뜻과 소리만 기억하면서라도 상황에 맞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한자를 좋아해서 다행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초등학생의 한자교육에는 반대한다. 지금 추세가 법조계, 의학계 등에서도 어려운 한자어들을 쉬운 표현으로 바꾸려고 하고 있고, 동사무소 등의 관공서에서도 모든 공문서를 한글전용으로 발급하고 있는데 이와는 반대로 어린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대학을 졸업해서도 영어 쓸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한테도 모든 시험의 기준이 영어가 되어가는 사회에, 한글공부만 제대로 해도 부족할 아이들에게 영어로 힘들게 하면 됐지 한자까지 배우도록 강요한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너무 하는 것 아닐까?

동음 이의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데 한자교육의 유용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고 해도 생활하며서 몇 번 안 만나는 그런 동음이의어를 이해하기 위해 별로 쓸 일도 없는 한자를 그렇게 열심히 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필요하면 그때 그때 몇 자 가르치고 배우면 될 일인데 말이다. 나 자신도 중학교, 고등학교 때 한문시간을 통해 한자를 배웠고 한시 읽고 해석하는 것을 재미있어 해서 제법 즐겼지만 실상 요즘엔 한자 쓸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 놀면서 자라야 할 우리 아이들이 한자에까지 시간을 빼앗겨야 한다는 사실이 참 안타깝다.